관촉사 연혁

관촉사 연혁

서기 968년 (고려 광종 19)에 혜명화상에 의해 창건되었고, 혜명화상은 1백여명의 장인과 함께 970년 석조관음보살상의 조성 공사를 시작하여 1006년(목종 9) 완성했다. 

 관촉사에 현존하는 건축물로는 미륵전과 대광명전, 삼성각, 명부전, 반야루, 해탈문, 사천왕문, 일주문 등이 있다. 
 문화재로는 석조미륵보살입상(일명 은진미륵; 보물 제 218호)과 석등(보물 제232호), 배례석(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53호), 석문(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79호), 오층석탑, 사적비 등이 있다.

석조관음보살상 조성에 관련된 연기설화

현 관촉사에서 동편으로 5리쯤 떨어진 사제촌에 사는 어느 여인이 산나물을 채취하기 위해 반약산 서북편에 이르렀는데, 그 때 어디선가 어린아이 우는 소리가 들려오므로 찾아 가보니 인적은 보이지 않고 땅속에서 큰 바윗돌이 솟아났다. 이 때 기이하게 여긴 여인은 집에 돌아와서 자기 여서에게 절하였으며 여서는 다시 관아에 알리었다. 
이에 광종은 '아국의 길조이니 불상을 조성하라는 징조이다.' 라고 하였다.
옛 절터인 반약산에서 솟아오른 대석은 관세음보살의 영이라고 믿은 광종이 이 돌을 다듬어서 불상을 조상케 하였으니 명실공히 이 불상은 관음석상이라 할 것이다. 불상을 조성키로 한 조정에서는 발로에 사자를 보내어 석장을 널리 구하였다. 이 대 혜명화상이 응모하고 나섰다. 혜명은 공장 백여명을 동원하여 관음상을 조상하니 무려 37년(광종21년(970)-목종9년(1006)만에 대불사는 완성되었다.

관촉사 : 반야산에 있다. 돌미륵이 있는데, 높이가 54척이나 된다. 세상에 전해오는 말에, 고려 광종때에 반야산 기슭에 큰 돌이 솟아오른 것을 승 혜명이 쪼아서 불상을 이루었다 한다. 이?의 시에,

'마읍 동쪽 백여리, 시진 고을 관촉사네. 큰 석상 미륵불은 '내 온다, 내 나온다.' 하고 땅에서 솟아났단다. 눈 같이 흰 빛으로 우뚝이 큰 들에 임하니, 농부 벼를 베어 능히 보시하네. 석상에 때대로 땀 흘려 군신을 놀라게 했다 함이 어찌 구전만이랴. 국사에 실려 있다오.'
하였다.[(국역)신증동국여지승람3권 63쪽]

'모두 3단으로 된 이 불상은 거대한 규모의 입불로 조성되었다. 높이...55척 5촌/ 둘레...30척/ 귀의 길이...9척/ 미간 ...6척/ 입...3척 5촌/ 화광...5척/ 관고...8척/ 소개...6척 5촌/ 대개의 방광 ... 11척에 이른다.'

그리고 이 불상의 이마에 이고 있는 화불은 3척 5촌이고 손에든 연화지는 무려 11척이나 되는 대규모의 불상이다. 또한 머리 위에는 이중으로 된 보관을 쓰고 관의 둘레에는 풍어를 달았다.
 이렇듯 우람한 자용의 관음상이 세워지는 과정에도 신묘한 영이가 뒤따랐다. 앞에서도 살펴보았듯이 이 석상은 모두 세 부분으로 되어 있으니 각 부분과 상세,하체를 모두 따로따로 만들어서 포개 놓은 것이었다.
그런데 하체는 낮아서 죄대 위에 올려놓는다 치더라고 그 윗부분을 올려 세우는 일이 매우 어려운 문제였다. 혜명화상의 지혜로써 미치는 바가 못되었다. 그런데 하루는 강가에서 두 어린애가 노는 것을 보고 나서 비로소 쾌재를 올릴 수 있었다.
애들이 소꿉장난을 하고 있었으니 즉 세 동강의 토불을 크게 만들어서 불상을 세우고 있었다. 먼저 땅을 평평하게 고르고 하체를 세우더니, 다시 흙모래를 하단 주위에 널따랗게 모아 올리는 것이었다. 평평한 지반이 만들어지니 토불의 중간부분을 끌어 올려서 먼저 세울 하체에 맞추어 조립 하였다. 다시 그 키에 맞도록 흙모래를 모아 올린다음 토불의 윗부분을 올려놓는다. 그런 뒤에 긁어 모았던 모래를 모두 파헤쳐 버리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토불은 우뚝 서게 되었다고 한다.
이것을 처음부터 지켜보고 있던 혜명은 괘재를 부르며 환희용약하였다. 역사의 현장으로 달려온 혜명은 먼저 기단을 청초하였으며 이어서 아래서부터 차례료 올려 세우니 마침내 관음석상의 조성불사는 원만히 성취되어 회향하였던 것이다. 이 때 관음석상을 세워 마치니 문득 큰 비가 내려 석상에 묻어있던 흙모래 등이 깨끗이 씻기었다고 한다.
이리하여 관음석상의 상호는 더욱 아름답고 서기가 충만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 예경하는 신앙심이 일어났다. 이러한 소문이 퍼져서 참배자가 줄을 이어 성시를 이루었으므로 그 앞에 흐르는 물은 시진이라 하였다고 전한다. 우뚝 솟은 이 관음석상은 우리 겨레의 온갖 고액을 감싸주는 대비 보살상임을 여실히 나타내고 있는 것이며, 관음석상의 미간에 옥호광명이 휘황하여 그 서기가 하늘에 뻗쳤으니 나라가 태평할 때요, 만일 나라에 어려움이 닥쳤을 적에는 온 몸에 땀이 흐르고 연화지도 빛을 잃었다고 한다. 보국안민을 염원하는 관세음의 덕화가 아닐까.
[신증동국여지승람권3 은진불우조;관촉사사적비문 참조.